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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산다 (~2024)

2:) 박민규_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by 뷰우 2016. 11. 9.

*의도치 않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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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라는 작가가 가진 사회를 향한 시선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그리고 2009년 그가 가진 시선이란 것이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는 이 사회가 얼마나 버벅거리며 발전하는지. 새삼 놀라움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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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한마디로 축약해야 한다면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삶'이라고 하고 싶다. 

소설 속 남자는 사는 모습을 희망이란 오타마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의미한 '삶;과,  반복적인 행동이 무의미하게 나열되는 '생활'로 나눈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생활을 여자의 존재유무로 나눈다. 

갑작스레 사라진 그녀의 흔적을 더듬으며 살아가는 그의 시간에서 나는 생활의 모습을 보았는데,  훗날 남자가 그러한 생활이 쌓인 봄을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던 봄'으로 칭하는 글에서, 사랑이 남아있는 한 사람은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남자가 누구라도 감히 가치를 정의내리기 힘든 '삶'을 살아갔다고? 혹은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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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다. 그녀의 모습에 나를 투영시켰다. 그리고 그녀가 받은 시선과 상처에 공감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전보다 개성이 인정되는 사회임에도 '못생김'의 영역이 점점 넓어진다는 것이다. 더 완벽해져야 하고,  이런 틀, 저런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춘 뒤 자신의 모습에 만족한다. 당신들 이렇잖아! 라고 말하기엔 아닌 척하며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는 내 모습이 너무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건 온전히 나의 생각이지만,  책을 읽는 여성 중 대다수가 그녀의 경험에 혹은 심리에 공감할 것 같아 참 아쉽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녀 자신을 '여성'으로 인정하던 독일에서는 아닐 것이냐 물어보면 내가 겪은 독일 사회를 보면 그건 또 엄밀히 따졌을 때 아닐 것 같다.  어떤 사회에서든지 자기 자신을 사회가 원하는 방향대로 꾸미려는 모습이 있기 때문에 유행이 있다. 나는 개인이 그러한 유행의 흐름에 얼마나 자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지 즉, 개인이 사회에서 얼마나 독립적으로 자기 자신을 주장할 수 있을 만큼의 성숙도를 가지는지, 그 강도가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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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인상적인 플롯이다.      설마->에이 역시 그렇지->대체 이건 뭐지 의 느낌으로 결말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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